


나도 하나 있었네 / 이사벨라
가끔 다른 사람에게서 서리한 얘기를 듣는다. 말하는 사람은 달라도 표정은 모두 같다. 눈동자는 아득히 먼 곳을 보고 입이 살짝 벌어진다. 한결같이 만족스런 표정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자면 어쩐지 나는 그만 안달이 난다. 때로는 내게 없는 추억이 그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에 약이 오를 때도 있다.
최근 티비에 초당옥수수가 자주 나온다.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는 옥수수라니 신기했다. 그러던 중 마트에서 판매하는 것을 봤다. 무슨 맛인지 궁금해 네 개들이 한 봉지를 2990원에 구입했다. 집에 와서 맛을 보니 풋풋한 풀내음이 입안을 채운다. 그 익숙한 맛이 머리 속을 헤집는다. 입에서 시작해 온 몸을 휘휘 돌던 맛이 마침내 꼭꼭 숨어있던 것을 찾아낸다.
어릴 때 관악산 밑에서 살았다. 비탈진 골목길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면 농작물을 심은 밭이 있었다. 주로 배추나 무, 호박, 오이, 고추, 옥수수 등이었다. 그것들이 어린 싹일 때는 무심히 지나치지만 조금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그냥 지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배 부른 날보다 허기진 날이 더 많은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 쑥 자란 옥수수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줄기를 꺾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빨 사이로 풋풋하면서도 달큰한 즙이 스며들었다. 껌을 씹듯이 꼭꼭 씹으며 걷는데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를 심은 사람이 보고 있지 않은지 두리번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손에 든 옥수수대를 누가 볼세라 얼른 풀숲에 던지고 입안에 씹던 것을 뱉었다. 그러고도 두근대며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 생각난다.
초당옥수수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었다. 꼭꼭 숨어있던 풋풋했던 순간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이제 나도 남들의 서리 얘기를 들으며 배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내게도 있으니까!
#나도하나있었네 #이사벨라 #바람결 #바람꽃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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