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국여행을 했습니다. 이틀동안 평생 본 눈 보다 더 많은 눈 속을 걸은 것 같습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시선은 하얀 꽃에 두고 하늘을 날고 땅을 달렸습니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을 떠날 궁리를 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국이 아니라 나란 존재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거지요. 누구나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고 주민등록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그 번호를 삭제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눈길을 걷다보니 오래 전 산동네가 생각났습니다. 겨울이면 추레한 지붕들을 덮던 하얀 눈. 비탈진 길에 눈이 쌓이면 동네 아이들은 신이나서 미끄럼을 탔습니다. 미끄러운 길을 더 미끄럽게 만드는 아이들과 넘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어른들의 연탄재 투척이 겨울내내 반복되는 산비탈 길이 떠오릅니다. 떠오른 기억의 파편은 연이어 아버지를 불러냅니다. 내 방랑기질의 근본 원인은 아버지입니다. 난 그를 지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술과 주정으로만 기억되는 그를 깨끗이 도려내고 그와는 상관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게 끊임없이 떠나라고 속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에서 떠나 전혀 모르는 나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합니다. 설국에서 다시 그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래요, 그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나의 그림자니까요. 오늘은 눈 내리는 게 예쁘다며 아이처럼 웃던 모습이 생각 났습니다. 말년의 그는 철부지 아이처럼 지냈습니다. 오래된 술들이 그의 정신을 잠재운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평생 바라던 일을 말년에 이룬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야 조금 그의 마음이 보입니다. 한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집안을 지키는 가장이 가장 노릇을 못했습니다. 그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오죽하면 술을 마심으로 세월을 죽였을까. 문득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난 내 욕망을 잠재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에서 자유롭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설국에서 본 그림자가 참 길기도 합니다.
#영원한나의그림자 #이사벨라 #바람결 #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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